오래전, 아직 내가 조각 일을 막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톨랜드의 유명 조각가 마크 스톤 님 밑에서 겨우 심부름이나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매우 이상한 의뢰가 들어왔다. 톨랜드의 명망 높은 귀족 가문인 크림슨가의 사당에 선대 가주들을 추모하기 위한 조각상들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조각가에게 이런 의뢰가 들어오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문제는 크림슨가에서 요청해 온 내용이었다. 사당 입구에는 아이나르 신의 은총을 전하는 성스러운 조각상을, 사당 안에는 사악한 악마의 조각상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신성하고 경건해야 할 사당에 악마상이라니!

귀족들의 별난 취향에 대해선 익히 들어왔지만, 나는 왠지 모를 찝찝함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스승님은 그들이 제시한 막대한 대금에 의뢰를 수락하였고, 나는 스승님 곁에서 작품들이 완성될 때까지 잡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완성된 조각상들은 각각 사당의 입구와 내부에 배치됐다. 아이나르 여신의 조각상들은 사당 입구에 세워져 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겼고, 안쪽에는 악마를 본뜬 조각상들이 선대 가주들의 관 위로 음산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를 본 크림슨가 사람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좋습니다. 이제야 우리 크림슨 가문의 사당 같군요."라며 돌아갔다.

아이나르 여신상과 사악한 악마상의 기묘한 조화를 보고 그런 감상을 내뱉다니.... 처음에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몇 년이 흐른 뒤. 크림슨가에서 쏟아져나온 수많은 변종 마물들로 인해 그들의 '비밀'이 폭로되자,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어째서 그들이 자신들의 사당 안쪽에 악마상을 만들었는지 말이다. 아마도 그건, 겉으론 명예로운 귀족 가문이었던 크림슨가 내부에 숨겨진 악마적인 본성을 표현한 게 아니었을까...?

물론 크림슨가가 멸족된 이상 그 진실을 알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