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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덱스 작업 유형: 수집 카테고리: 감시대 주둔지 인근 편 |
불의 신 프라마칸은 막강한 불의 권세로 강한 힘을 가진 종족, 오크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오크는 지나치게 호전적인 탓에 주변 종족과 어울리지 못하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만을 되풀이했다. 특히 오크와 인간 두 종족은 가장 비슷한 방식으로 사회를 구성함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의도를 곡해하며 오랜 시간 칼을 휘둘러 왔다.
지난 10년간의 통계 자료에 따르면, 매년 오크에게 사망한 인간의 수는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의 2배에 달한다. 언제고 오크에게 가족을, 연인을, 친구를 떠나보낼 수 있는 한 인간으로서 이 무의미한 싸움을 멈출 수만 있다면 어떠한 희생도 감내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오크라는 종족을 올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나, 찰스 러셀은 오크들이 사는 깊은 협곡을 두 손 두 발로 기어올랐고, 변신 물약을 한계까지 복용하며 그들의 삶 속에 파고들었다. 이 책은 이렇게 접한 오크들의 생활상을 한데 정리한 관찰 일지로, 다른 무엇보다 어떤 오해나 편견 없이 본 것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책의 전반부에서는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았던 오크들의 생활상을 다루었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오크의 생로병사를 통해 시간 앞에 자유로울 수 없는 한 생명체로서의 오크를 다루었다.
아무쪼록 이 기록이 이제껏 한자리에 서지 못했던 두 종족을 화해와 회합의 자리로 이끌어 가는 데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랄 따름이다. 내가 처음 찾아간 오크 부족은 라슬란의 포노스 부족이었다.
나는 여러 자료를 토대로 포노스 부락이 있을 법한 지역을 특정하고, 감시대 주둔지에서 만난 노련한 모험가들에게 의뢰하여 여정을 시작했다.
모험가들은 기대 이상의 베테랑이었고, 덕분에 우리는 최소한의 교전으로 목표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은 떠나기 전 자신들 몫의 비상식량과 약품을 나눠주었고, 갈고리 사용법을 알려주었으며, 불의의 사고로 돌아올 수 없게 될 경우 가족에게 남길 말도 물어봐 주었다. 이 자리를 빌려, 물심양면으로 나를 지원해 준 아이바와 친구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포노스 부락은 높은 벼랑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다. 감시병의 눈을 피해 벼랑을 오르는 것은 일평생 책상 앞에만 앉아 있던 사람에게는 무척 버거운 일이었지만, 흉흉한 오크들의 도끼를 피해 부락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간신히 숨을 돌리고 오크들의 부락을 내려다보자, 너저분한 천막과 생소한 집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것 하나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그중 가장 호기심을 끄는 것은 어린 오크들이었다. 나는 며칠간 분위기를 살핀 뒤, 어린 오크를 좀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부락으로 내려갔다.
대량으로 준비해 둔 오크 변신 물약은 오크들 틈에 섞여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나는 발걸음이 뜸한 이른 아침, 첫 잠입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온몸이 떨려 서 있기조차 힘들었지만, 틈틈이 오크의 몸으로 변신하여 감을 익힌 덕에 곧 적응할 수 있었다. 오크들은 어린 개체를 절대 부락 밖에 내놓지 않기 때문에, 그간 어린 오크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부락 이곳저곳을 누비는 어린 오크들을 연신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자라면 무섭기 그지없는 오크지만, 아이들이 귀여운 것은 어느 종족이든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통통 뛰어다녔고, 저희들끼리 몸싸움을 하며 개구지게 놀았다. 그래서 아이들의 장난감이 시퍼렇게 날이 선 도끼라는 걸 알았을 때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 흉측한 것을 빼앗아 던져 버릴 뻔했다.
다행히 포노스 오크는 태생적으로 질긴 근육과 단단한 피부를 가지고 있어서 어지간한 날붙이에는 상처조차 남지 않는다. 그래서 포노스 부족의 아이들은 갓난아기 때부터 금이 가거나 부러진 도끼를 장난감 삼아 가지고 놀았다. 걸음마보다 도끼 잡는 법을 먼저 배우는 셈이다.
또한 포노스 오크는 무서운 완력을 가지고 있어서 어린 오크라 하더라도 금세 도낏자루를 쪼갤 만큼 악력이 강해졌다. 낡은 도끼를 몇 개쯤 부숴 먹은 아이들은 곧 자기 손에 맞는 첫 번째 도끼를 선물 받았다. 그러나 오크에게는 생애 첫 무기가 별 의미 없는 모양인지, 대부분 멧돼지 사냥에서 잃어버리거나 부숴 먹었다.
멧돼지 사냥은 어린 오크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놀이지만 멧돼지에겐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이 사냥에 빠지는 시간은 길지 않다. 이 무렵의 포노스 오크는 성장 속도가 무척 빨라서,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인의 골격이 잡힌다. 부쩍 자란 몸집에 자신감이 붙은 소년들은 사냥보다 또래끼리 겨루는 데 더 큰 흥미를 보인다. 소년에서 청년이 되기까지, 포노스 오크는 끊임없는 싸움으로 스스로를 증명한다.
이렇게 포노스 오크는 신체적으로 우월할 뿐 아니라, 승부욕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과거, 오크들이 통합 부족을 만들었을 때 포노스 부족은 첫 부족장을 배출하는 영광을 누렸는데, 여기에는 이들의 유별난 호승심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칼투란 부족의 아이들은 좀 더 독특한 방식으로 자라난다.
칼투란 부족은 오크 반, 늑대 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늑대를 키우는데, 이렇게 자란 늑대들은 어린 오크를 키우는데 많은 역할을 한다.
어린 오크를 보살피는 일은 요람에서부터 시작된다. 늑대들은 갓난 오크의 요람에 누워 자신의 체온을 나눠주고, 아이들이 울기라도 할라치면 부모를 대신하여 놀아주기까지 한다. 아이들의 다리에 힘이 붙기 시작하면 늑대들은 무리 사이에 아이들을 두고 서로 밟히고 채이며 걸음마를 가르친다. 걸음마를 뗀 아이들은 눈깜빡할 새에 뜀박질과 늑대 타는 법을 익히는데 이 모든 과정이 오롯이 늑대들의 보살핌 속에 이루어진다.
손 끝이 영글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늑대의 도움을 받아 채집 활동을 시작한다. 상대적으로 체구가 작은 칼투란 부족은 주변 민가를 약탈하는 대신 채집과 사냥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어린 오크들의 채집은 전적으로 늑대들의 집중력과 관찰력에 의지하여 이루어지는데, 늑대를 타고 비교적 먼 거리를 이동하기 때문에 산맥을 넘나들며 상당히 풍부한 수확을 거두곤 한다.
좀 더 손끝이 여문 오크들은 활을 들고 사냥에 참여한다. 이 초보 사냥꾼들은 배우는 것도 없이 바로 실전에 던져지는데, 조직적이고 치밀한 늑대들의 몰이 덕에 사냥 성공률이 꽤나 높은 편이다. 사냥에 익숙해 지기 시작하면 소모하는 화살 수가 점점 줄어드는데, 하나의 화살에 한 마리의 사냥감을 잡게 되면 소년들은 비로소 어른으로 인정 받는다.
늑대의 덕을 보는 것은 이 뿐만이 아니다. 늑대와 함께 자란 칼투란 아이들은 우두머리가 가져야 할 통솔력과 부족원이 가져야 할 조직적인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힌다. 비교적 덩치가 작은 칼투란 부족이 우악스럽기 그지 없는 여러 오크 부족을 상대로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영리하게 전투를 운용하는 족장과, 그 지시를 일사분란하게 따르는 부족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칼투란 부족의 전술은 우두머리 오크의 통솔력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칼투란 부족은 대부분의 오크 부족과 달리 가장 현명한 오크를 선출하여 절대적인 권한을 위임한다. 요컨데 칼투란 부족은 인간과 가장 비슷한 방식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오크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아키두 부족은 가장 오크다우면서도 오크답지 않은 부족이다. 이들의 초대 족장 아키두는 여러 오크 부족을 모아 하나의 통합 부족을 만들었는데, 이때 아키두는 포노스와 같은 강한 힘도, 칼투란과 같은 통솔력도 없이 오직 화술만으로 쟁쟁한 지도자들을 설득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통합 부족은 무려 세 명의 족장을 거치며 유지되었는데, 태생적으로 반골인 오크가 이토록 오랜 시간을 함께 한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키두는 통합 부족의 족장이 되지는 못했다. 포노스를 비롯한 강자들의 투쟁에서 적절한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아키두는 금단의 주술에 손을 뻗었고, 흑마법의 힘에 기대 4대 통합 부족장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순수한 힘을 숭상하는 오크들은 이러한 결과에 불복했고, 그의 통합 부족 역시 갈가리 찢어져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스스로의 손으로 모든 것을 망쳤지만, 아키두의 욕망은 멈출 줄 몰랐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오크들을 모아 아키두 부족을 만들고, 그중 강한 개체를 뽑아 어둠의 힘을 부여했다. 그것이 지금까지도 대륙 곳곳에 나타나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어둠의 오크의 시초다.
불행 중 다행히도, 모든 오크가 흑마법의 힘을 견딜 수 있는 건 아니다. 많은 아키두 오크가 주술의 여파로 목숨을 잃었고, 새카만 재가 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어쩌면 이는 불의 신 프라마칸이 주제넘는 힘을 탐한 오크들의 불을 꺼뜨린 결과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