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한 베르칸트 가의 장원에는 몹시 낡은 양 목장이 하나 있다. 지금은 텅 빈 목장이지만, 과거에는 그곳에도 구름 같은 양 떼와 목동들이 살고 있었다. 소년 샘도 그중 하나였다.
샘과 목동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저택에서 보낸 생필품이 도착할 때였다. 바구니 안에 든 간식도 기대되었지만, 그 시간을 기다리는 가장 큰 이유는 바구니를 들고 오는 사람, 노온 베르칸트 때문이었다. 노온은 베르칸트 가문의 차녀로 무척 아름답고 상냥한 사람이었는데, 가끔은 저택의 하인들 대신 커다란 바구니를 혼자 들고 오곤 했다. 그녀는 목장을 살펴보고 부족한 것을 챙겨줄 뿐 아니라, 쉴 새 없이 떠드는 아이들의 이야기도 귀찮은 기색 없이 들어주었다. 그래서 그녀가 돌아갈 때가 되면, 목동들은 아쉬운 마음에 그녀를 따라 하염없이 배웅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노온을 따라간 목동들은 그녀가 구불구불한 숲길로 향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곳에는 어떤 근사한 청년이 노온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살짝 주위를 둘러본 두 사람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함께 숲속을 거닐었다.
그 조심스러운 모습을 본 샘과 목동들은 둘의 만남을 비밀로 해야 한다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은 암묵적으로 노온의 비밀을 지켰고, 그 사실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목동들이 본 청년은 크림슨 가문의 라자루스 크림슨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훗날 베르칸트와 크림슨 두 장원에 커다란 재앙을 불러왔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샘과 함께 양을 치던 목동들과 다정한 이웃들도 참사를 피할 수 없었다. 샘은 변고가 생기기 전 가족과 톨랜드를 떠났지만, 뒤늦게 소식을 들은 그는 두 사람의 일을 비밀로 한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가 입을 열었더라도 보잘것없는 목동의 이야기에는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테지만, 그런 사실은 샘에게 아무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고, 베르칸트 가문의 묘지를 찾아 참회하길 바랐다. 이에 세상을 떠난 샘을 대신하여 여기, 그의 이야기를 남긴다. 할아버지, 이제 부디 하늘에서 평온하세요.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를 추모하며, 신디 헤이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