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마법사의 일기
OO년 XX일
아무래도 요즘 주변에서 수상한 거동을 보이는 자들이 배회하는 것 같다. 이곳 빛의 신전에 생필품과 식량을 배달해주는 요제프 씨도 그런 놈들을 본 것 같다며 한참동안 불안을 호소했다. (사실은 있는 지 없는 지 모를 괴한들보다, 나나 델루즈 노아가 신전에서 제대로 생활을 꾸리고 있는 지가 더 불안한 듯 했지만....)
어쨌든, 수상한 자들이라면 짐작가는 바가 있다. 이전에 이곳을 지키던 선배들도 신전에 봉인되어 있는 퀴티스의 심장을 노린 습격이나 침입이 종종 있었다고 했으니, 아마도 어둠술사의 잔당들일 것이다. 만약 이런 일이 또 생긴다면 학회에 추가 인원 파견을 요청해 보는 것도 고려해볼 만 하다.
OO년 XX일
델루즈 노아와 지역을 나눠 정찰을 돌았다.
우리 둘이서 다 돌기엔 너무 넓은 지역이기에 다소 고민했으나, 델루즈 노아가 거인 전쟁 이후에 버려진 소형 골렘들에 마법 도식을 덮어 쓰는 방법을 제안했다.
그녀의 아이디어는 항상 대범해서 나로선 생각지도 못할 것들이 많다. 덮어 쓰기는 꽤나 성공적이어서, 오늘 하루에만 스무개의 골렘을 되살려 정찰에 내보냈다. 위험성이 없다는 것만 검증되면 좀 더 수를 늘려도 좋을 것 같다.
OO년 XX일
정찰을 나갔던 골렘 중 일부가 파괴되었다. 마물의 짓이라기엔 석연치 않은 흔적이라, 아무래도 어둠술사들이 나타났을 상황에 대비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델루즈 노아는 창조의 빛 학회에 도움 요청을 자는 내 의견에 반대했다. 그걸 막기 위해 우리가 여기 와 있는 건데, 아직 적의 모습을 확인한 것도 아닌데 우는 소리를 보내자는 거냐고...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다. 내가 너무 소심한 걸까? 사실 난 아직까지 어둠술사를 직접 맞닥뜨린 적이 없기 때문에 겁이 나는 걸지도 모른다. 나와 같이 파견된 것이 그녀라 다행이다. 이런 고민을 하는 걸 보고 도와주면 도와줬지 뒤에서 욕을 할 성격은 아니니까.
OO년 XX일
일주일 넘게 정찰 골렘들이 어떤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골렘이 많이 풀린 것을 보고 적(으로 추정되는 자)들이 좋은 상황이 아니라 판단하고 물러간 게 아닐까 싶다. 나는 골렘에 방어 능력을 추가로 부여하고 개체 수도 100개까지 늘릴 것을 제안했다. 델루즈 노아도 흔쾌히 응했다. 다만 지난 번에 마법 도식 덮어쓰기에 필요한 시료들을 거의 다 써서, 새 시료를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요제프 씨가 방문하려면 모레는 되어야 하니 그때까진 다른 재료들을 준비해 놓기로 하자.
OO년 XX일
요제프 씨가 방문한 김에 시료를 만들기 위한 구매 목록을 전달했다. 약간 얼굴이 질린 듯 보였던 건 기분 탓이겠지? 다음 번 정기 전달 때 가져오겠다고 해서 가능하면 추가금을 내더라도 빠른 시일 내에 전달을 부탁했다. 전부 다 구해오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수도 있을 거라고 했는데, 그 정도는 어쩔 수 없지. 거미의 다리를 말린 가루 정도야 우리도 마련할 수 있지만 곱게 짠 삼베 조각 같은 건 어떻게 해도 사오는 수 밖에 없으니까.
OO년 XX일
손이 떨려서 제대로 글을 남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아니, 어느 쪽을 최악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방심한 것을 노렸을까. 수십 명의 어둠술사들이 신전을 습격했고, 골렘들은 장애물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가 설치한 순간이동 마법진을 역으로 강탈하여 이런 말도 안되는 습격을 감행한 것이다... 경계 마법도, 결계도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이대론 둘 다 죽는 수 밖에 없다는 느낌이 든 순간, 델루즈가 퀴티스의 심장을 꺼내서 사용하자고 했다.
나는... 물론 말렸다. 하지만 진심으로 반대하고 말렸다고 할 수 있을까. 죽는 게 너무 두려웠고, 눈 앞에는 너무나 큰 힘이 있었다. 게다가 어차피 이것을 빼앗긴다면 우리는 헛되이 죽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나는... 그렇게 거대한 힘을 꺼내서 휘두를 배짱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 힘을 손에 드는 순간 그 힘에 지배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나를 멈춰 세웠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신이시여. 정말 난 어떻게 했어야 할까. 모르겠다. 그녀는 퀴티스의 심장을 손에 든 채 모든 어둠술사를 순식간에 전멸시켰고... 그리고 그 힘의 폭주는 멈출 줄을 몰랐다. 그녀의 모습이 점점 인간이 아닌 것으로 변해하는 걸 볼 수 밖에 없었다. 결국에 그녀가 모든 어둠술사를 죽이고 나를 쳐다봤을 때, 난 그녀가 나 조차 죽이려고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도망쳤다. 신이시여. 내가 뭘 쓰고 있는 걸까. 그녀는 이제 괴물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지키려고 했던 퀴티스의 심장은 이제 재앙이 되었다.
어떻게 하지. 돌아갈까. 돌아가야 한다. 그래 학회로 돌아가서, 내가 저지른 비겁한 짓을 고백하고 그녀를... 인간으로 되돌리자. 여태까지 수도 없이 날 도와준 그녀를 내가 도와야 한다. 제발... 제발 그게 가능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