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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덱스 작업 유형: 수집 카테고리: 송곳니 마을 인근 편 |
어느 톨랜드 망명자의 기록
나는 본래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본 이 일에 대해선 누군가에게 꼭 알려야 할 것 같아서 펜을 든다. 무시무시한 그날의 진실에 대해. 본래 라이칸들은 사납고 잔인하지만, 어린아이와 전사가 아닌 여자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전설 같은 것이 있다. 사냥꾼은 잔인하게 살해되었지만, 여자와 어린아이는 멀쩡하게 마을로 돌아왔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니까.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나는 아키움 군단과 손잡은 영주의 명령으로 톨랜드까지 진출한 라이칸 코완주키 부족을 토벌하기 위해 나섰다. 코완주키란 부족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대대로 내려오는 그놈들의 족장 이름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것 자체가 이름이 아니라 일종의 호칭일지도 모르겠다. 당시 코완주키 부족은 어찌나 기세가 흉흉한지, 토벌전에 나섰다고 하지만 되려 우리가 토벌되는 것이 아니냐며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듣기로는 새로운 코완주키는 얼마 전 부족장 자리를 물려받아 엄청난 힘을 자랑한다고 했다. 그러니 톨랜드까지도 진출해 왔겠다만. 코완주키의 거대한 포효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는 게 고작이었다. 숲에서 갑자기 나타난 라이칸들은 우리 동료들을 도륙했고, 옆의 동료가 반으로 찢어지는 순간 나는 무슨 힘이 났는지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 이후에, 아래에서 보이는 건 온통 비명과 죽음이었다. 겁에 질린 채 덜덜 떨면서 나뭇가지에 미친 듯이 매달려 있는데, 갑자기 무언가 타는 듯한 냄새가 났다. 설마하니 라이칸을 잡겠다고 숲을 모조리 태우려는 건가 하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다. 나무 위에 매달려 살아남은 건데, 이대로 있다간 나도 불에 타 죽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나무에서 내려가면 그 즉시 라이칸의 발톱에 찢길 것 같아, 나는 이도 저도 못 하고 아래만 내려다보았다. 그때 내 눈에 띈 게 그 소녀였다. 열넷? 열다섯? 새카만 긴 옷에 새카만 머리카락이 너울대는 게 현실 같지 않았는데, 그녀 주변을 돌고 있던 보랏빛 기운이 더욱 꿈처럼 보이게 했다. 그다음에 본 건, 내가 죽더라도 잊을 수 없는 일이리라. 소녀가 손을 가볍게 휘두르자, 그녀 주변에 맴돌던 보랏빛 기운과 똑같은 빛이 일면서 주변의 라이칸들이 가루가 되었다. 그렇다, 문자 그대로 잿가루가 됐다. 온 몸이 잿가루로 변하며 허공에 날리는 그 모습에 나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소녀가 걸어가는 길 뒤로 타버린 냄새가 흩날렸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그 앞쪽에 다른 라이칸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무시무시한 라이칸이 나타났다. 특이하게 생긴 털가죽을 뒤집어쓴 모습에, 나는 바로 그놈이 코완주키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코완주키를 향해 걸어갔다. 믿어지는가? 그 거대한 덩치의 코완주키를 향해 소녀가 손을 들자, 코완주키는 자기 옆에 서 있던 부하를 앞으로 던졌다. 코완주키 대신 앞으로 밀린 그 부하가 다음 순간 잿더미가 되었다. 소녀는 춤이라도 추듯 가볍게 다시 손을 흔들었다. 코완주키의 거대한 덩치가 엄청난 속도로 멍청히 서 있던 자기 부하 뒤로 뛰었고, 그와 함께 앞에 서 있던 라이칸이 또 잿더미가 되었다. 그토록 악명이 높으면서도 긍지 있다 알려졌던 코완주키는 자신이 살려고 부하를 속속 희생시켰다. 바로 다음, 소녀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고 그때 코완주키의 어마어마한 비명소리가 울렸다. 나는 그 소리에 놀라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으나 간신히 버텼고, 코완주키는 거대한 덩치가 무색하게 그대로 쏜살같이 달아나고 말았다. 나중에 듣기로, 그때 코완주키의 눈알이 하나 날아갔다고 한다. 어쨌거나, 그렇게 코완주키는 심복을 모두 잃고 도주했고, 그 뒤에는 나도 기억이 없다. 나중에 깨어나보니 그대로 기절해서 나무 위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다행히 그 소녀는 나 같은 졸병에겐 관심이 없었는지, 아니면 일단은 같은 편이어서 그랬는지 한쪽 팔과 다리가 부러진 것 외엔 다른 부상은 없었다. 머리를 다치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랄까. 하지만 깨어난 나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잿더미가 되어 사라지던 라이칸들의 모습이 꿈에도 나오곤 했다. 언제 그녀가 주변의 모든 군사를 잿더미로 만들고 죽음의 여신 같은 모습으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팔다리가 다쳤다는 핑계로 어떻게든 숲 경계의 캠프에 남았다가 죽을 각오로 탈영을 감행했다. 반쯤 기듯이 스톤가드 쪽으로 넘어가 마을을 발견했을 때, 덜덜 떨던 나는 그제야 비오듯 땀과 눈물을 흘렸다. 마을 사람들은 내가 탈영병인 것을 알고는 따뜻하게 맞이해주었다. 그들의 말로는, 북쪽 톨랜드로 영토를 확장하던 코완주키 부족이 어느 순간 갑자기 돌아와서는 북으로 통하는 모든 다리를 끊어 버리고 계곡에 틀어박혔다고 했다. 또한, 그 이후로 라이칸들은 여자건 아이건 상관없이 잔인하기 그지 없는 행태를 보인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톨랜드나 스톤가드나 크게 생활이 다를 건 없을 거라며 날 위로했지만... 난 아무 상관 없었다. 그저 그 무시무시한 소녀와 같은 땅에 있지 않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괜찮았다. 그러니, 누군가 이 글을 읽을 사람이 있다면 부탁한다. 보랏빛을 두른 검은 머리의 소녀가 나타난다면... 아니 이제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부디 도망쳐라. 그곳이 어디든, 당신이 어느 소속이든 그저 도망쳐라. 아마도 그것만이 당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일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