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월 01일
최근 연이어 발생하고 있는 실종 사건들을 조사하던 중, 캐슬러 마을 인근 농가에서 또 다른 실종 사건이 접수되었다. 실종자는 40대 중년 남성 '마르켈'이란 자로, 불과 1년 전 캐슬러 마을 주점에서 함께 술을 기울였던 유쾌한 남자였다.
농장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만삭의 부인을 둔 한 가정의 가장으로, 별다른 원한 관계조차 없는 평범한 농부라고 했다. 즉, 마르켈은 하루아침에 가족과 친구들 모두를 버리고 사라질 이유가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게 사건이 미궁에 빠지던 때, 나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아내인 에멜린으로부터 마르켈이 본래 캐슬러 마을이 아닌 골드픽 마을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낀 나는 곧장 지난 실종 사건 기록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마을에서 없어진 실종자들 역시 마르켈과 같은 골드픽 마을 출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이것이 이번 사건의 중요한 단서가 되지 않을까?
갑자기 사라진 실종자들, 그리고 골드픽 마을....
지금으로선 실종자들의 출신지인 골드픽 마을로 향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겠다.
10월 13일
나는 연쇄 실종 사건의 실마리가 될 골드픽 마을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도에 표시된 곳에는 사람은커녕 짐승들조차 없는 스산한 폐허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허탈함을 달래며 돌아오던 중, 나는 우연히 방문한 근처 여관에서 한 떠돌이 상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여관 주인에게 골드픽을 묻는 나를 발견하고는, 조심스레 다가와 자신을 그루드란이라고 소개했다. 그러고는 골드픽 마을이 불과 몇 년 전, 한 마녀에 의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르면, 골드픽 마을은 본래 평화롭고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을 유지였던 기온 그로빈이 저택에서 일하던 하녀 '키르케'를 마녀로 몰아세웠고, 대대로 그로빈 가문의 덕을 본 마을 사람들은 기온의 주장에 일제히 동조하였다고 했다.
이후, 골드픽 마을 광장에는 마녀의 화형식이 진행될 장작이 높게 쌓여 올라갔다. 마녀로 몰린 키르케는 거친 불길 속에 내던져져 한 줌의 재로 남을 운명이었으나.... 그녀가 가까스로 도망치면서 화형식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골드픽 마을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말았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키르케의 짓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괴담에 가까운 그의 말을 무시하려 했으나, 그루드란은 자신의 이야기를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이어서 그는 골드픽 마을 출신이자 그로빈 가문의 하녀장으로 일했던 달리아를 찾아가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라 하였다.
과연 그의 말을 신뢰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달리아가 골드픽 마을 출신이라면 다른 실종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0월 15일
그루드란이 일러준 마을은 골드픽 만큼이나 외진 곳이었는데, 나는 다행히 그곳에서 달리아라는 여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비록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긴 했지만, 눈빛만큼은 여느 젊은이 못지않게 또렷하고 강렬했다. 나는 달리아를 만나자마자 실종자 '마르켈'를 비롯한 연쇄 실종 사건 피해자들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무척 불쾌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주름투성이 얼굴을 구기고는, "그놈들이 키르케, 그 불쌍한 아이를 죽이려 했어!"라며 호통치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그녀의 증언은 무척이나 끔찍했다. 당시 그로빈 가문의 하녀장이었던 달리아는 어느 날 하녀 하나가 목을 매 죽은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상황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급히 새 하녀를 고용했는데 그게 바로 '키르케'였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키르케는 무척이나 정숙하고 조용한 소녀였는데, 달리아는 순진한 그녀를 볼 때마다 늘 걱정스러웠다. 그로빈 가문의 차남 에이먼을 둘러싼 추잡한 풍문 때문이었다.
달리아의 걱정대로, 어린 키르케는 에이먼의 꾐에 빠져 몰래 아이까지 갖고 말았다. 진심으로 에이먼을 사랑했던 그녀는 남몰래 아이를 낳았지만, 비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추문을 원치 않았던 그로빈 가문의 주인이 키르케를 부정한 여인으로 만들고, 그녀에게 마녀의 누명을 씌워 죽이려고 한 것이다. 그의 밑에서 일하던 골드픽 마을 사람들은 키르케의 결백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생계를 지키기 위해 그녀를 마녀로 몰아가는 데에 동참했다.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달리아는 화형식이 벌어지기 직전, 몰래 그녀와 아기를 마차에 태워 보냈다. 하지만 뒤쫓아 온 마을 사람들에 의해 마부는 처참히 살해당하였고, 키르케는 검붉은 숲으로 도망쳐 자취를 감췄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다고 한다. 소식을 들은 달리아가 뒤늦게 그녀의 뒤를 따라 검붉은 숲으로 가보았으나... 그곳엔 싸늘하게 죽은 아기의 시신만이 남아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과연, 키르케는 현재 어디에 있는 것일까?
11월 01일
키르케의 사연에 대해 들은 뒤, 나는 곧장 그녀가 마지막으로 사라졌다는 검붉은 숲을 찾아갔다. 설마... 키르케가 복수를 위해 골드픽 출신 사람들을 납치한 것은 아닐지 하는 우려를 품고 말이다.
물론 키르케가 이번 연쇄 실종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사라진 사람들 모두 키르케를 마녀로 몬 공범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이상, 그녀를 만나 조사해 볼 필요가 있었다.
우중충한 숲은 마치 죽은 자의 숨결이라도 머금은 듯 눅눅한 습기로 가득했다. 나는 검붉은 숲의 경비를 담당하는 저항군들에게 허가를 받고 키르케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키르케가 아직 이 숲에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지만, 그녀가 마지막으로 발견된 장소를 수색하다 보면 자그마한 단서라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야심한 밤이 될 때까지 숲을 조사하던 중, 나는 어디선가 느껴지는 음산한 기운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오싹한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금빛호밀 농장의 실종자... 마르켈, 그자가 검붉은 숲 한 가운데에 나타난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마르켈이 아니었다. 단지 그를 똑 닮은 유령이었을 뿐. 놀람도 잠시, 마르켈을 닮은 유령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공격을 해오기 시작했다. 급히 호신용 검을 휘둘러 그를 퇴치하니, 유령은 서슬 퍼런 혼불이 되어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혼불은 마치 정해진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천천히, 쉬지 않고 흘러갔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우선 그 혼불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과연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으나, 왠지 그 끝에 내가 찾는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다.
11월 02일
나는 푸른 혼불을 따라 정처 없이 숲속을 끌려다녔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자, 어느새 나는 실레우스의 심연 앞에 다다라 있었다. 대체 여기에 뭐가 있을까. 도망친 키르케? 마르켈과 같은 실종자들? 하지만 그곳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사람이 아닌, 분노와 원한으로 가득 찬 마녀의 원귀였다.
살기 어린 원귀를 처음 마주했을 때, 난 공포에 사로잡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키자, 갑자기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내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비참함, 무고한 죄를 뒤집어쓰고도 외면받은 억울함, 그리고 소중한 아이마저 빼앗긴 깊은 슬픔까지. 이윽고 나는 깨달았다. 이 원귀는 다름 아닌 키르케, 그녀라는 걸.
"당신이 이 연쇄 실종 사건의 범인인가?"
원귀의 상처를 알게 된 나는 놀랍게도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곧이어 그녀가 보여준 또 다른 환영은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려주었다.
삶의 모든 것을 빼앗긴 키르케는 처절한 복수를 위해 마법사 실레우스를 찾아갔다. 영원한 복종을 대가로 금서를 건네받은 그녀는 죽은 영혼들을 부리는 강령술을 얻게 되었고.... 이후, 그녀는 원귀가 되어서까지 자신을 해한 사람들을 찾아내 목숨을 빼앗았다. 그러고는 그들의 영혼마저 착취하여 끝나지 않는 복수를 이루어 낸 것이다.
자신에게 마녀의 누명을 씌워 죽이려 했던 자들 앞에 '진짜' 마녀가 되어 나타난 키르케. 그녀는 모든 환영이 끝난 후, 나를 죽이는 대신 검붉은 숲 밖으로 놓아주었다. 과연 키르케가 나를 살려준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는... 자신의 사연이 세상 밖에 알려지길 원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