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릴 겨를도 없이, 그는 짧은 미소만 남기고 강력한 마법을 발동했다.
운명적인 사건
베네룩스 마법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엘리오르는 다른 학생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차분하고 냉철한 태도, 예리한 통찰력, 천재적인 마법 실력까지. 그는 모든 수업에서 항상 최상위 성적을 기록하며 교수들의 자랑거리가 되었고, 나는 그의 반대편에서 언제나 엉뚱한 실수로 주목받기 일쑤였다. 특히나 변신 마법에선 번번이 낙제를 면치 못했고, 곧잘 말썽을 피웠다.
그러던 어느 날,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내가 변신 마법 시험 중 실수로 감독관을 가고일로 변신시켜버린 것이다. 돌로 변한 감독관이 천장을 날아다니는 공포의 대상으로 변하자, 시험장은 아수라장이 됐고 나와 눈이 마주친 가고일은 죽일 듯한 기세로 나를 향해 돌진했다. 죽었구나! 하는 순간 누군가 가고일 앞을 가로막고 침착하게 주문을 외쳤다. "아르카니스 움브리엘 디스펠로!!" 엘리오르였다. 그의 용기 넘치는 목소리와 단호한 손짓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모두가 혼란에 빠져있던 순간, 엘리오르의 마법은 거대한 돌괴물을 인간으로 되돌렸고, 결국 사건은 엘리오르의 지혜와 용기로 마무리되었다. 그날 이후, 엘리오르는 나와 각별한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이 사건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네뷸라 섬으로
세월이 흘러, 우리는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엘리오르는 마법학교를 졸업하고 마법사로서 더 높은 과정에 진학했고, 나는 검술의 소질을 살려 마검사가 되었다. 몇 년 후, 마검사가 된 나는 네뷸라 섬을 모험하는 어느 길드에 합류하려 했고, 그 길드에서 길드장으로 있던 엘리오르와 재회했다. 마법과 지혜를 두루 겸비한 엘리오르는 길드의 수장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인물로 성장해 있었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된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우리 둘은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서로를 반갑게 맞이했다. 뛰어난 길드원들이 많이 모여 사기가 높아진 우리는 드디어 네뷸라 섬으로 향했다.
하지만 네뷸라 섬을 목표로 한 여정은 첫날부터 험난했다. 온갖 함정과 괴물들로 가득한 섬은 그야말로 지옥 같았고, 길드원들은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우리가 목표했던 봉인의 성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대부분의 길드원이 희생된 상태였다. 길드원들이 피로와 공포로 녹초가 되었을 때, 거대한 석조 병사들이 나타나며 최악의 위기가 닥쳐왔다. 석조 병사들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길드원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고, 결국 남은 사람은 나와 엘리오르뿐이었다.
절망속의 고군분투
팽팽한 긴장 속에서 엘리오르는 마지막 결심을 한 듯 보였다. 말릴 겨를도 없이, 그는 짧은 미소만 남기고 강력한 마법을 발동했다. 그 마법은 주변의 모든 것을 정지시키는 치명적인 주문이었다. 그의 손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온 순간, 그의 몸은 굳어가기 시작했다. 돌로 변해가는 엘리오르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그의 얼굴엔 친구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결심과 용기가 깃들어 있었다. 나는 이대로 끝낼 수 없었다. 그가 남긴 마법서를 펼쳐 들었고, 그를 되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이해할 수 없는 내용 투성이였지만, 그의 마지막 미소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거의 모든 내용을 알아냈으나 마지막 실행 주문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절망에 사로잡힌 끝에, 돌이 된 그의 입모양을 보다가 문득 어린 시절 엘리오르가 가고일을 되돌릴 때 외쳤던 주문이 떠올랐다. "아르카니스 움브리엘 디스펠로!!"
나는 엘리오르를 향해 그 주문을 되풀이했고, 결국 기적이 일어났다. 석화된 엘리오르의 몸에 서서히 생명의 빛이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돌처럼 굳어버린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엘리오르는 온전한 원래의 몸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대부분의 길드원들을 회복시켰고, 유물까지 찾아내며 우리의 모험을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돌이켜 보면, 그때 절망에서 우리를 구한 기적은 우연이 아닌 우정의 산물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