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스톤가드 성에서 세금 관리인으로 일하던 때의 일이다. 직속 선배 제임스와 나는 세금을 매길 수 있는 인구를 조사하기 위해 비엔타 마을로 파견되었다.
지금의 비엔타 마을은 포도밭이 푸르게 펼쳐져 있지만, 페르난이 집권하던 시기에는 가혹한 세금에 시달린 농부들이 아예 밭을 갈아 엎어 곳곳에 누런 흙이 드러나 있었다. 촌장과 유지들을 만나 대충 마을의 형편을 파악한 우리는 포도밭에 난 길을 따라 항구로 내려갔다.
당시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워준 것은 스톤가드 연안의 작은 고깃배들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생선을 손질하는 어른들 뒤로 한 무리의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었다. 옷차림은 가난한 가정들이 흔히 그렇듯 낡고 지저분했지만 아이들은 그저 신나게 뛰어 놀 뿐이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막 자리를 옮기려 할 때, 제임스가 내 팔을 잡았다.
항구가 끝나는 구석진 곳에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혼자 앉아 있었다. 아이는 거친 바위 사이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졸고 있었는데, 언뜻 보기에도 몸 상태가 나빠 보였다.
내가 다가가자 아이는 반짝 눈을 뜨고 겁 먹은 표정을 지었다. 가까이서 보니 아이의 상태는 더 심각했는데, 오랜 시간 학대를 받아 온 것 같았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다가가 다정하게 아이의 이름을 물었다. 아이는 '3 솔란트'라고 대답했다.
아이는 갓난아기 때 이 어촌 마을에 버려졌는데, 다들 어려운 형편이라 선뜻 맡으려 하지 않았다. 아이의 양부는 주정뱅이에다 동정심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었지만, 매일 빵 한 조각을 지원해 주겠다는 촌장의 말에 대뜸 아기를 키우기로 결정했다. 그 빵값이 3 솔란트였다.
사람이 이토록 무정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나는 촌장까지 찾아가 그 양부라는 작자를 찾으려고 했지만, 그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걸핏하면 집을 비우고 잘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나와 제임스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발벗고 뛰었다. 다행히 스톤가드 성의 한 가정이 아이를 맡아주겠다고 했다. 자비로운 성정의 부부는 이름 없는 아이를 가여워하며 함께 새 이름을 지어주자고 했다. 나는 아이의 보랏빛 눈동자를 떠올리고, '바이올렛'이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깜짝 선물을 준비한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다시 아이의 집을 찾았다.
그러나 비엔타 마을은 전과 달리 경비병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촌장에게 자초지종을 묻자 간밤에 아이의 양부가 살해 당하고, 아이는 실종되었다는 믿을 수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장 사람을 풀어 아이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만한 여력은 없다는 매정한 대답만 돌아왔다.
아이가 걱정되어 견딜 수 없었던 우리는 목격자를 수소문한 끝에 그날 밤 마을 근처를 지나던 떠돌이 상인을 찾아냈다. 그는 어린 소녀와 마법사 하나가 함께 길을 걷는 것을 보았는데, 등불을 든 소녀의 표정이 너무나 평온하여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는 상인의 말을 토대로 현장에 남은 마법 흔적을 조사하려 했지만, 스톤가드 성의 마법사들을 움직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수소문 끝에 간신히 도와주겠다는 사람을 찾았지만 이미 스톤가드의 바닷바람이 모든 흔적을 지워버린 후였다.
이때의 기억은 무거운 앙금이 되어 아직도 내 가슴 속에 남아있다. 나는 지금도 매일 아이나르께 그 아이의 행복을 기원한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어엿한 아가씨가 되어 있을 것이다. 만약 기적이 일어나 다시 그 아이를 만나게 된다면, 우리가 얼마나 그 아이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3 솔란트 따위가 아닌, '바이올렛'이라는 예쁜 이름이 있었다는 것을 꼭 알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