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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니 왓슨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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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무너진 별빛 천문대 인근 편

바니 왓슨의 일기 1

3월 11일

샤일록 형이랑 제로이 형이 싸웠다.
평소에도 자주 싸우긴 하지만 이번엔 아예 길에서 몸싸움을 벌였다! 샤일록 형은 수염이 뜯기고 제로이 형은 코피가 났다. 아무래도 샤일록 형이 이긴 것 같다.
아버지가 그렇게 화나신 건 형들이 나를 지붕에서 떨어뜨린 이후로 처음 본다. 왓슨 가문의 긍지는 똥통에 버렸냐면서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셨다. 내 방에서도 다 들렸다. 아마 옆집 사람들도 들었겠지.
웬일로 제로이 형은 아버지께 대들었다. 코 양쪽에서 코피를 줄줄 흘리는 것만 아니면 멋있었을 텐데. 형은 왓슨 가문의 후계자는 아직 안 정해졌는데, 왜 샤일록 형이 후계자 행세를 하고 다니냐고 따졌다. 사실 그건 맞는 말이다. 요즘 샤일록 형은 거만하게 수염을 쓰다듬는 버릇이 생겼다. 말투도 아버지처럼 바꿨다. 왜 갑자기 늙은이처럼 말하냐고 물어보면 본인은 태어날 때부터 그런 말투였다고 우긴다.

샤일록 형이 제로이 형보다 나이가 많긴 하지만, 원래 우리 상단의 후계자는 철저히 실력으로 정해진다. 아버지도 둘째 아들이었거든. 그러니까 제로이 형 말도 일리가 있다.
아버지도 그렇게 느끼셨나 보다. 그날 밤 식사 자리에서, 공정하게 후계자를 뽑을 수 있도록 방법을 생각해보겠다고 하셨다. 형들은 서로 이글이글 노려봤다. 밥을 먹고 나서 제로이 형은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면서 ‘우리 막둥이는 형들 중에 누가 후계자가 되면 좋겠어?’ 라고 물었다. 샤일록 형은 내 볼을 꼬집으면서 ‘바니는 당연히 내 편이라네.’ 라고 말했다.
형들이 모르는 게 한 가지 있다. 나는 바니 왓슨, 열네 살. 두고 봐라. 왓슨 상단의 후계자는 형들이 아니라 내가 될 것이다!

바니 왓슨의 일기 2

3월 13일

아버지가 형들을 부르셨다. 좋은 생각이 나신 모양이다.
곧 초롱꽃이 열릴 시기이다. 우리 상단은 둥지 초원에서 초롱 씨앗을 수확해서 초롱 비누로 만드는데, 이 비누가 우리 상단의 최고 인기 품목이다.
문제는, 둥지 초원은 엄청 위험한 곳이다. 사람을 부리로 찢어 죽이는 공포새들이랑 가시가 뾰족한 코이코이들이 산다. 심지어 초롱 씨앗은 동물 털 같은 데 달라붙는 씨앗이라, 공포새랑 코이코이를 죽여야 얻을 수 있다.
우리 같은 연약한 상인들은 씨앗을 수확하는 동안 용병들한테 호위를 부탁하는데, 지난번에는 공포새한테 용병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도 그때 다리를 다치셨다. 씨앗이 부족해서 비누도 많이 못 만들었고.
그래서 아버지가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내신 모양이다. 초롱 씨앗도 최대한 많이 수확하고, 왓슨 상단의 후계자를 공정하게 뽑는 방법! 바로 둥지 초원에서 대축제를 여는 것이다.
모험가들한테 공포새랑 코이코이를 죽여서 씨앗을 모아와 달라고 부탁하고, 그 대가로 전표를 지급할 거라고 한다.

전표를 많이 모으는 모험가한테는 상단에서 상품도 줄 거다. 모험가들끼리 경쟁을 붙여서 우리 상단이 이득을 보는 거지. 아버지는 정말 존경스럽다.
형들은 따로따로 씨앗을 납품 받을 거라고 한다. 둘 중 누가 모험가들에게 씨앗을 더 많이 받아낼 수 있나 정정당당하게 겨루는 거다. 그렇게 여러 번의 축제를 열어서, 누적 성적이 더 좋은 사람이 왓슨 상단의 후계자로 정해진다고 한다!
형들도 이 방법이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바로 축제 준비에 대해서 의논하기 시작했다. 나는 구석에서 노는 척을 하다가 슬그머니 그쪽으로 갔다.
아버지가 ‘그럼 축제에 쓸 보상과 전표 두 종류를 준비하라고...’까지 말씀하셨을 때, 내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세 종류겠죠.’
아버지랑 형들이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 형들보다 씨앗을 많이 모으면, 제가 왓슨 상단의 후계자가 되는 거죠?’
내가 생각해도 좀 멋졌다.

바니 왓슨의 일기 3

3월 14일
샤일록 형이 내 방에 찾아왔다.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나를 훈계했다. 내용을 요약하면 대충 이렇다.
상인의 근본은 신용이다! 모험가들이 어린애를 어떻게 믿고 씨앗을 주겠냐! 초롱 씨앗 대축제는 장난이 아니다! 네가 상단의 후계자가 될 순 없다! 다시 생각해라!
한 시간짜리 설교를 몇 초로 요약했더니 피곤해서 자야겠다.
솔직히 억울하다. 형들은 키도 크고 목소리도 낮아서 거짓말을 해도 사람들이 속는데. 아무래도 모험가들이 보기엔 내가 별로 안 믿음직스럽겠지.... 어떻게 하면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

3월 15일
샤일록 형이 둥지 초원의 지도를 선물로 주었다.
아마 어제 길게 잔소리를 한 게 미안했던 모양이다.

3월 20일
제로이 형이랑 싸웠다. 형은 아침을 먹자마자 박치기 공포새처럼 내 방에 들이닥쳤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이상한 시비를 거는 것 아닌가! 내가 어제 상단 거래 장부를 보고 나서 제자리에 갖다 놓지 않았다나,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내가 장부는 샤일록 형이 가져갔다고 하니까 제로이 형은 갑자기 거북하게 웃으면서, 내일 대축제 때 어떤 전략을 쓸 거냐고 물었다. 그렇게 티 나게 물어보면 누가 알려 주나!
형은 그 성격을 손님들 앞에서 어떻게 숨기는지 모르겠다. 다들 형이 친절하고 넉살 좋다고 하는데, 그건 다 연기다. 사실은 화도 많고 질투심도 많고 무진장 감정적이다. 그건 샤일록 형 잘못도 있다. 형이 어릴 때 제로이 형을 못살게 굴었다고 들었거든.
그나저나 제로이 형은 전략을 세운 모양인데... 뭘까? 모험가들을 잘 설득하는 것 말고도 다른 전략이 있나? 전표 외에 다른 건 지급하지 않기로 정했는데?
설마 씨앗 하나에 전표 하나만 주는 게 아니라... 다른 방법이 있는 걸까?
궁금해서 잠이 안 올 것 같다. 드디어 내일이 축제인데! 내가 씨앗을 제일 많이 모을 수 있겠지?

바니 왓슨의 일기 4

3월 21일

아... 망했다.
모험가들한테 믿음직스럽게 보이려고 가짜 수염도 붙이고 목소리도 최대한 동굴처럼 낮게 냈는데, 형들이 모은 씨앗의 반 정도밖에 납품 받지 못했다....
끝나고 나서 축제에 참여했던 모험가를 붙들고 왜 나한테는 씨앗을 안 줬냐고 물어봤다가, 수상해 보여서 믿음이 안 갔다는 말을 들었다. 우울하다....
이번 축제는 샤일록 형이 이겼다. 제로이 형은 아까부터 방에 틀어박혀서 안 나오고 있다.
뭐, 다음 축제도 있으니까. 나는 작전을 바꿔야겠다. 내 얼굴에 수염이 안 어울리긴 했지. 앞으로는 옷도 평소에 입는 걸로 입고, 목소리도 평소처럼 낼 거다. 안 수상하게.
나는 귀여움으로 승부한다! 형들보다 내가 훨씬 귀여우니까!
두고 봐라. 다음 축제에는 내가 꼭 씨앗을 가장 많이 모아서, 왓슨 상단의 후계자가 될 거다!

exitl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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