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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운명적인 사랑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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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무너진 별빛 천문대 인근 편

어느 운명적인 사랑의 기록 1

친애하는 줄리아,

용서를 구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쓰니, 부디 읽어주십시오.
당신을 속인 것에 대한 원망은 얼마든지 해도 좋습니다. 다시는 저를 만나고 싶지 않으시다면 그것 또한 받아들이지요. 그러나 당신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접근한 것은 맹세코 아니니, 오해를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을 처음 본 날, 저는 새롭게 만든 새 미메트를 실험해보기 위해 숲속으로 나갔지요. 새를 날리고 기다렸는데, 한참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숲을 헤치고 나아가다가, 들꽃 사이에 앉아 있는 당신을 본 것입니다.
그 순간 저는 하늘로 날아오른 것처럼 어지러움을 느꼈습니다. 당신의 눈은 여름의 숲 같았고, 금빛 머리카락은 가을의 들녘 같았습니다. 당신의 무릎 위에 날개가 부러진 새가 앉아 있다는 것도, 그게 제가 만든 미메트라는 것도 나중에 깨달았지요.
그날 당신이 창조의 빛 학회의 마법사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제가 실라베스 교단의 어둠술사라는 것을, 당신의 동료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존재라는 것을 밝혀야 옳았겠지요.

하지만 저는 당신의 눈동자가 경멸로 물드는 것을 볼 자신이 없었습니다. 차마 그날은, 그날만은... 하지만 그 이후에도, 당신을 만나는 날마다, 결국 준비한 말을 하지 못하고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무슨 변명이 소용 있겠습니까. 줄리아, 저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았어요. 당신에게만은 경멸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 비겁한 마음 때문에 당신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결국 이렇게 상처를 주고야 만 것입니다.
줄리아, 저는 어릴 때부터 사막을 떠돌았습니다. 제 출신지도, 부모의 이름도 알지 못합니다. 제 몸 속의 힘은 언제 폭주할지 알 수 없었고, 그걸 알게 된 이들은 모두 저를 꺼려했습니다. 그때 저를 찾아와 보살펴주고, 힘을 제어할 수 있도록 마법을 가르쳐준 자들이 실라베스 교단의 어둠술사들입니다. 그들의 마법이 흑마법으로 불린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습니다.
당신이 보는 내 손은 추악한 어둠으로 물들어 있겠지요. 하지만 당신을 대하는 제 마음에는 한 순간도 거짓이 없었습니다. 그것만은 의심치 말아주시길 간곡히 바랍니다.

타이달

어느 운명적인 사랑의 기록 2

보고 싶은 타이달,

내일 아침이면 당신이 집에 오겠지만, 할 말이 생각나서 미리 적어 두려 해요.
오늘 숲 속을 걷고 있는데 자고새 떼가 보여서, 당신과 처음 만났던 날이 생각났어요. 기억하시나요? 당신이 그날 날려 보낸 자고새가 제 앞에 추락해서 날개가 부러졌잖아요. 그때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당신이 만든 미메트는 아무리 봐도 새와 똑같았어요. 날갯짓이 좀 어설픈 것을 빼면요.
삼 년 전에 저를 위해 실라베스 교단을 떠나면서, 당신은 다시는 흑마법을 쓰거나 미메트를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었죠. 그때는 그게 옳다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제가 당신에게서 중요한 걸 빼앗은 건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들어요.
타이달, 당신이 지닌 재능의 본질은 사악한 게 아닐 거예요. 교단은 당신에게 살상용 미메트를 만들도록 강요했지만, 당신은 위험한 마물만큼이나 귀여운 동물도 잘 만들었던 사람이잖아요.

어떤 마법사도 그렇게 생동감 넘치는 미메트를 만들 순 없을걸요? 별의 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당신이 늘 세상을 주의 깊게 관찰하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물고기의 비늘도, 오소리의 줄무늬도 똑같이 정교하게 만들 수 있었던 거예요.
저는 당신의 그런 섬세함이 좋아요. 당신은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건 세상에 대한 애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그러니까 어느 날 당신이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진다면, 저는 찬성이에요. 곧 태어날 우리의 딸도, 당신이 만들어준 동물 미메트 친구들이 있다면 즐거워하지 않을까요?
참, 들어 봐요. 이번에야말로 좋은 이름이 생각났어요. 당신이 ‘호르텐스’나 ‘거투르드’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니... ‘애시핸’은 어때요? ‘물푸레나무 아래 앉은 아이’ 라는 뜻이에요.

당신의 줄리아

어느 운명적인 사랑의 기록 3

사랑하는 줄리아,

미안하오. 당신이 부모님과 보내는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지만, 급한 일이오.
당신이 떠나기 전에 애시핸이 최근에 그린 풍경화를 식탁 옆에 걸어 두었지 않소? 오늘 낮에 애시핸을 재우고 그 그림을 보고 있었소. 눈이 보이지 않는데도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다니, 우리 딸은 천재가 분명하오.
어쨌든 그림을 보고 있는데, 애시핸이 그린 풍경이 어디인지 알 것 같았소. 언덕 너머에 사과나무 들판 있지 않소? 봄에 애시핸이 벌에 쏘였던 곳 말이오. 그림을 가까이에서 볼수록 풍경이 선명해지는 기분이었소.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내가 그 들판에 서 있는 것 아니오? 손을 뻗으니 사과나무 잎사귀가 잡혔소. 이곳은 가을인데, 그곳은 사과 꽃이 만발한 봄이었다오. 조금 걸어가다 보니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것처럼 더 나아갈 수 없었소.
그때 커다란 벌 한 마리가 날아와서 내 팔을 쏘았는데, 아픔이 심해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소.

다시 눈을 떠 보니 나는 식탁 앞에 서 있고, 눈앞에 애시핸의 그림이 있었소. 더 놀라운 것은, 벌에 쏘인 팔이 상처 없이 멀쩡했소. 마치 모든 게 꿈속에서 일어난 일처럼 말이오!
줄리아, 나는 그런 마법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소. 그건 내가 만드는 어설픈 미메트 따위와는 다른, 일종의 세계를 창조하는 힘이오. 앞으로 그 아이의 힘을 탐내는 탐욕스러운 자들이 얼마나 많을지, 생각만으로도 두렵소.
팔 년이나 지났지만, 실라베스 교단은 아직도 나를 추적하고 있을 것이오. 교단의 손길은 솔리시움 땅 전체에 뻗쳐 있고, 그들은 배신자를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오. 만약에 교단이 애시핸의 그림에 대해 알게 된다면...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하오. 지금보다 더 자주 거처를 옮기고, 철저히 대비할 필요가 있겠소.
이 와중에 애시핸은 오소리 미메트를 안고 잘 자고 있다오.
조심해서 돌아오시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는 견딜 수 없을 거요.

당신의 타이달

어느 운명적인 사랑의 기록 4

타이달,

시간이 됐는데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이 돼요. 당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저항군이 우릴 도와줄지도 모른다니, 그런 헛된 희망 때문에 당신을 멀리까지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까 환상 결계의 테두리 바로 밖까지 어둠술사들이 다녀갔어요. 우리가 근처에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게 분명해요.
애시핸은 하루 종일 웅크려서 떨다가 잠들었어요. 이 상황이 얼마나 답답하고 무서울까요?
어둠술사들이 오늘 밤 이 집을 찾아낸다면, 애시핸을 데려가려고 한다면....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지만,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봐 무서워요.

아... 결계 밖에서 다시 인기척이 들려요. 정말로 이게 당신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타이달, 당신이 떠나기 전에 물었었죠? 그날 숲속에서 당신을 만난 것을, 당신의 정체를 알고도 사랑한 것을, 당신과 인생을 함께하기로 정한 것을 후회하냐고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모든 걸 미리 알았더라도, 전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을 거예요.
당신을 만나서 저는 행복했어요.
사랑하는 타이달, 애시핸을 잘 부탁해요.

당신의 줄리아

어느 운명적인 사랑의 기록 5

사랑하는 줄리아,

봄이 되어 들꽃이 피었소. 자고새들이 나무 위에 앉아 있다오.
당신의 말대로 저항군은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소. 그들의 도움으로 몇 년 동안 교단의 어둠술사들을 추적해서, 당신을 죽인 이들을 하나씩 내 손으로 찢어 죽였다오.
애시핸은 저항군의 보호를 받고 있소. 그 아이의 힘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소.
그 아이는 당신을 닮아서 낯선 사람들과도 서슴없이 어울린다오. 곧잘 웃고, 재잘재잘 말도 많소. 주변의 풍경을 늘 궁금해해서, 모르는 사람도 한 번 붙들리면 그 아이에게 마을 곳곳을 설명해 줘야 하오. 밝은 성격의 아이로 자라날 것 같소.
이제 나도 당신에게 돌아갈 차례요.
애시핸이 나를 위해 그림을 그려주었소. 끝없이 위로 뻗어 나가는 마법진의 탑이오. 이곳에서 나는 미메트를 만들고 있소.
그것들은 연습할수록 실제처럼 정교해진다오. 곧 신조차도 나의 피조물을 생명과 구별할 수 없을 거요.
교단이든 창조의 빛 학회든 나의 일을 방해하게 둘 순 없소. 그들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미메트들을 남겨 놓을 생각이오.

저항군들은 며칠씩 어딘가로 사라지는 내가 걱정되는 모양이오. 나를 붙잡고 현실이니 부모의 도리니 하는 무의미한 이야기를 떠들어댄다오.
그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소. 그림 속에 있는 세상은 현실과 다르지 않소.
아니, 이곳은 현실보다 나은 곳이오. 이곳에는 아름다운 것들만 존재하고, 태양과 구름도 나의 손짓에 복종한다오.
줄리아, 무엇보다 이 세상에는 당신이 있소.
이곳 어딘가에 당신이 있소. 나를 부르는 당신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오. 어서 당신에게 새로운 육체를 만들어주고, 예전처럼 함께하자고 말이오.
줄리아, 당신이 없는 세상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소. 나는 이 길을 따라 탑의 끝까지 올라가겠소. 그곳에는 나를 향해 웃어주는 당신이 있을 것이오.
사랑하는 줄리아, 나를 기다려 주오.

당신의 타이달

정렬 기준: 등급 날짜
Kiriak 17-10-2024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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